TORONTO

Joe Hyun Been Jo

Admin view 5854 Dec 01, 2014

2005년, 탬플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학과 영화영상학을 전공한 나는, 졸업과 동시에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북미의 미디어와 영화 영상 매체의 메카인 LA에서 프로로 사회의 첫 발을 내딛고 싶었던 것이었다.

당시 현지 업계엔 상당수의 동기들이 이미 진출해 있었다. 그들에 대한 부러움도 한편으론 있었지만, 나 역시 좋은 회사에 취직해, 그들과 어깨를 견주며 활약할 수 있노라는 자신감 또한 충만했다. 그러나 정작 내겐, OPT 비자로 인해 일 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이 주어져 있었다. (OPT 프로그램이란, 미국 대학의 학부나 대학원을 다닌 외국인 근로자가 취업 비자를 받지 않더라도 학생 비자(F-1)만으로도 일정기간 동안 직장을 구하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그래, 1년 동안 부딪쳐 볼 수 있는 데로 부딪쳐 보자!”

그 무렵, 우리 동기들의 구직활동 역시 활발했고, 여기저기서 취직됐다는 소식도 점점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시엔 이력서를 10군데 내면, 한 곳에선 반드시 연락이 오는, 취업시장을 비롯한 경제 전반이 꽤나 좋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인지, 전공과는 딱 들어맞지 않더라도 연봉도 상대적으로 높고, 경력에도 훨씬 도움이 되는 곳에 취직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심산도 사실 어느 정도는 존재했던 것 같다.

본격적인 구직 활동을 위해, 우선은 moster.com이나 craigslist.org, 또는 지원하고 싶은 각 회사의 웹사이트에서 정보를 수집하였다. 나름대로 파악한 정보를 다시 1, 2, 3지망으로 각각 분류한 후, 하루에 세 군데씩 지원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연락은 바로 오기 시작했고, 뜻밖에 한 대기업에서 까지도 면접 제안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Samsung America 본사였다. 유학생 치곤 영어를 곧 잘하던 나에게 면접이란, 시험이라기 보단 일종의 쇼케이스 자리로 느껴졌다. 그렇기에 전날 별다른 준비랄 것도 없이, 그저 드라이 클리닝한 정장에 어떤 넥타이를 매고 가는 것이 좋을까 정도만 생각했다.

면접 당일, 피면접자로 선 내 앞에는 두 명의 인사과 담당자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백인 면접관, 또 다른 한 명은 한국인 여성 면접관이었다. 아주 형식적인 질문을 시작으로, 이어서 내가 잠시 일했던 미국의 어느 한 방송국의 인턴생활 이야기로 넘어갔다. 면접을 위한 이렇다 할 준비도 없었던 나는, 경험을 묻는 질문들 조차도 딱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많이 배웠다’ 정도로만 짧게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전체적으로 인터뷰는 약 20분 정도 진행이 되었고, 더 이상 질문 없냐는 한국인 여성 면접관의 마지막 물음에 ‘없다’라고 짧게 답하자, ‘와줘서 고맙다’는 마지막 인사로 인터뷰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내 기대만큼 대단하거나 특별할 것도 없는, 나의 첫 번째 영어 면접 경험인 것이다. 면접장을 나서던 길에 보니, 들어올 때는 한 명도 없었던 대기실이, 나갈 무렵엔 내 뒤로 4명의 대기자들로 차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메일로 불합격 통보가 날아왔다. 기분은 착잡했지만, 첫 번째로 치른 면접인 만큼 좋은 경험으로 삼으며, 코리안 타운에서 친구와의 술 한잔으로 씁쓸한 마음을 달랬다. 그 이후로 흥미롭게도 많은 대기업에서 연달아 연락이 왔다. 그 중에서 LG와 E-trade(미국 최대 온라인 주식회사)란 곳에서 인터뷰 제의를 받게 되었는데, 결과는 모두 불합격이었고, 그 때마다 역시 한잔의 술로 훌훌 털며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고, 어느덧 내게 주어진 시간은 12개월에서 9개월로 줄어들었다. 이젠 부모님께도 뭔가 결과물을 보내드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압박했다. 많은 돈을 들여 유학까지 보낸 아들이 무직인 것에 대한 걱정을 더는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젠 여기저기 눈 돌리지 않고, 확실히 내 전공에 맞는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분야를 특정하여, 많은 미디어 회사에 지원했는데도, 신기하게 3개월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연락은 하나도 오지 않았고, 심지어 50군데를 보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4개월쯤 지났을 때, 드디어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KBS직영인 KBS America였다. 대학교 재학 시절, 한인 방송국과 미국 방송국에서 동시에 인턴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고, 특히 한인 방송국에선, LA로 오기 전까지 계속 일을 했었기 때문에 이번 방송국 면접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다만 미국까지 가서 굳이 한국 방송사에서 왜 일하려 하냐는 다른 사람들의 빈정대는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내겐 합격이 더 절실했다.

KBS America에서의 면접은 이전까지 접했던 어떠한 면접보다도 까다롭고 어려웠다. 인터뷰 현장엔, 5명 정도 각기 다른 부서의 중역으로 보이는 면접관들이 앞에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의 면접관과 20분 정도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한 후, 다른 면접관들도 한국어로 질문을 건네기 시작했다. 유창한 영어실력과, 방송국에서 일 한 경험을 바탕으로, 쏟아지는 질문에 자신감 있게 대답했는데, 특히 영상에 관한 한 모르는 부분이 없다고 자부할 만큼, 기술적인 면에서 능숙하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면접 때 한 말 중, ‘당장 내일이라도 현장에 배치된다면 일 할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 참담했다. 불합격 통보를 이메일로 확인한 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젠 더 이상 친구에게 술 마시자고 말을 꺼내지도 못하겠고, 나를 위로해 줄 친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 전공분야에서 까지 낙방한 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0이라는 자괴감 마저 들었다. 결국, 내가 찾은 연이은 불합격의 연결고리를 끊는 방법은 면접 공부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우선은 면접 책을 여러 권 사서 내용을 나름대로 분석하며, 다른 한편으론 이미 합격한 친구들에게 면접 조언을 구했다. 그 중, 한 친구가 면접에 크게 도움이 될만한,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녀는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보다 1년 전에 LA에 와서 영화배급사 영업부분 마케팅 사원으로 일을 시작한 크리스탈이다. 그 친구의 조언은 그 어떤 면접 관련 서적보다, 또 여타의 조언들 보다 더욱 값지게 와 닿았다.

“LA란 곳은 다른 곳들보다 JOB HOPPING(이직률)이 훨씬 높아. 아마 미디어란 특성 때문 일거야. 뭐든지 프로젝트로 이뤄져 있으니까. 그래서 한 직장에서 6개월, 또 다른 곳에서 6개월 일했다고 해도 내 경력에 오점이 되질 않아. 하지만 면접스타일은 다른 곳과는 많이 달라. 다른 곳에서는 너를 팔러 가야 하는 게 면접이라면, LA에서는 네가 만든 상품을 팔러 가는 게 면접이야. 그래서 네가 만든 상품, 혹은 아이디어가 맘에 들면 너를 고용하는 거지. 마치 영화사가 영화감독의 영화아이디어를 사고 그 감독을 채용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고서야 그 사람들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데 너 때문에 왜 시간을 낭비하니?”

이 같은 이야기를 듣고, 전엔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던 크리스탈에게 포옹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조언으로 인해 면접을 한낱 영어시험 정도로만 생각했던 내 자신이 창피했고, 이제 조금은 면접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로부터도 계속되는 구직활동 중, 우연히 웹사이트를 통해 APPLE COMPUTER 채용 세미나란 곳을 찾게 됐다. 이는 북미에서는 흔하지 않은 공개채용 시스템이었다. 어떻게든 기회를 잡고 싶었던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내고 짧게 이야기를 한 후 집에 돌아왔다. 또한, 평소엔 주일에만 찾던 교회였지만, 오랜만에 새벽기도도 드리러 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연락이 오든 오지 않든 APPLE(애플社 – 이하 APPLE이라 한다.) 웹사이트를 페이스북 보듯 매일 시시때때로 검색하며 APPLE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하고 분석했다. 특히 제품 설명보다는 미디어섹션을 중점적으로 보게 되었는데, 더불어 주식의 동향까지도 체크했다. 당시에는 IPod 2가 막 출시될 때였기에, 나름대로 이에 대한 전망이나 새로운 구상도 자유롭게 하게 되었다.

“iPod이 칼라가 생길 것이고, 사람들이 이제는 노래 뿐이 아니라 비디오까지 볼 수 있을거야. 그렇다면 iPod에 들어갈 영상물과 음악파일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미디어센터 혹은 게임방 개념의 센터가 애플스토어에 생기면 어떨까? 그 미디어 센터를 ‘iStation’이라고 명칭을 붙여볼까? 그리고 그 공간에서 미디어 파일을 마음껏 다운로드 할 수 있게 된다면, iPod사용자도 많이 늘어나게 될거야. 더불어 애플스토어의 트래픽 또한 더욱 증가할 테고, 자동적으로 세일즈도 크게 향상되겠지?!”

당시, 구직 활동 외엔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을 구체화 시키자’는 생각으로 내 나름대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영상물을 구상하여 제작하는 일이었다. 영상을 전공으로 했던 나에겐 포토샵이나 영상 편집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밤 낮으로 매달려 몰두하면서도 즐거웠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로 대략 3, 4일은 정도는 정말이지, 구직 걱정, 돈 걱정 하지 않고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아주 값진 창작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완성을 한 후, 제작한 영상물을 과연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 궁리하다가, 그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곳은 바로 APPLE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APPLE 본사에 보내 보자!”

무직이었던 나에겐 상당히 큰 돈인 25불을 들여 FEDEX를 이용해 산호세 쿠포티노로 보냈다.
그로부터 일 주일 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APPLE에서 인터뷰 날짜를 통보한 것이다. 처음엔 긴가민가했고, 본사에서 전화가 온 건지, 아니면 채용 세미나에서 이력서를 보낸 것 때문인지 헷갈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채용세미나에서 내 이력서가 통과 되어서였다. 어쨌거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면접을 대비하면서 내가 이제껏 APPLE에 대해 연구했던 것들을 리포트로 작성했고, 그것을 토대로 집중적으로 영어 연습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들은 자연스럽게 프레젠테이션 형식이 되었다. 또한 직접 만든 영상물 역시 DVD에 담아 준비했다. 이렇듯, 그 당시에는 주변에서 내게 무엇을 묻든, 내 입에선 늘 APPLE 이야기 밖엔 나오지 않았을 만큼, 내 머릿속엔 온통 APPLE과 면접에 관한 것들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땐, 내가 삼은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한 순간들이었다.

면접 당일,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끝날 때까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말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본사에 DVD까지 보냈다는 내 사연을 들려줬을 땐, 면접관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좋아했다. 보통 나 같은 사람들이 보낸 메일이 한 두통도 아니기도 하거니와, 본사에 그런 우편물이 도착하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홧김에 직접 만든 DVD를 인사과 담당자들에게 보여줬다. 내 영상물을 감상한 그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세계 각지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이 보내는 작품이나 아이디어를 자신들 선에선 하나하나 다 검토하기 어렵기에 아쉽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내 작품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이끌어낸 것에 대해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막상 면접이 끝나고 나니 한바탕 웃은 기억 외엔, 정작 나에 대한 이야긴 별로 한 게 없다는 생각에 약간의 불안감이 스쳤다. 그래도 내가 그 면접장에서 주로 이야기한 것은, 스스로 만든 APPLE을 위한 아이디어와 APPLE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다. 내가 과연 잘 한 것일까?

이틀 정도 지난 후, 다행히도 2차 인터뷰가 잡혔다. 그 곳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1차 면접에 합격한 사람들이 대략 20명 정도 있었다. 세미나 때 본 사람들은 약 300여명 정도였으니, 이 정도 인원이면 많이 간추려진 수치였다. 2차의 경우, 조 별로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사실 1차 면접만큼의 큰 부담은 없었다. 회사 분위기가 워낙 화기애애해서 그랬던 것인지, 한결 차분해진 상태에서 면접을 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디어, APPLE측으로부터 OFFER LETTER를 받았다. 계약직에다 아직은 시급을 받는 풀 타임직이었지만, 거의 5개월만의 값지게 얻은, 나에겐 대단한 성과였다. APPLE에서 일했던 하루하루는 매우 즐거웠고, 그 시간을 통해 내 자신 또한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APPLE사 퇴사 후,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어서 약 5년간, 또 다른 노력하였다. 그리고 몇 년 전, 서른이 훌쩍 넘어 이력서를 내야 했던 시기 또한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경제가 많이 달라져, 이젠 이력서를 하루에 100군데를 넣어도 면접 한 번 잡기 힘든 시대가 와 버렸다. 많은 실패를 경험한 후 선생이 되었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현재, 위와 같이 아이디어를 갖고 가야 하는 전략이 그저 충분조건이던 시대는 이미 가 버린지 오래이며, 현재는 필요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 면접 세미나를 통해 그 동안 구직자, 이직자들을 많이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눈 결과, 10명 중 5명 이상이 내 생각에 공감하고, 이미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구축하여 저다마 목표한 업계에 도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앞으로 이 글을 통해, 진출하고자 목표한 회사의 비전을 분석하는 사고의 과정, 면접 때 말하는 방법 등, 그 외에 많은 주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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